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코 이론 (문단 편집) == 전술의 수립과정 == 포코 이론은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의 혁명 전략보다는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 당시 보여준 홍군 전략과 더 많은 공통점과 유관성을 갖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장악한 것(소위 중국 혁명)은 대략 40년대 후반의 일이며, 에드가 스노우나 아그네스 스메들리등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의 언론인들이 이 과정을 생생하게 세계 각지로 전달하기까지 하였다. 쿠바 혁명이 대략 5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임을 생각하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등의 쿠바 혁명 주도세력들의 입장에서 중국 혁명은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세기의 대사건이다. * 이에 비해,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1910년대 후반, 쿠바 혁명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30년도 더 이전에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다. 둘 중 어느쪽이 당시 쿠바 혁명 주도세력에게 더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을지는 불문가지의 일이다. * 쿠바 혁명의 주역중 하나인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보더라도 그가 극렬 마오쩌둥 [[빠돌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체 게바라는 평생동안 마오쩌둥에 대한 호의와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중국을 방문해 직접 마오쩌둥과 회견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어린 딸에게 '''나의 작은 마오'''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였다. * 남미의 체 게바라 뿐 아니라 유럽의 [[장폴 사르트르|사르트르]] 같은 인물도 마오쩌둥과 [[마오주의]]에 대한 호의와 지지를 드러낸 바 있으며, 십여년 뒤, [[68혁명]] 당시 서유럽이나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 내에서도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하는 조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즉, 당시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중국 혁명에 큰 관심과 호의를 가진 이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 * 애초에 중국 혁명(즉 중국 공산당의 집권)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혁명이 성공한 사례로써 20세기 중반의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감동/공포를 안겨준 사건이다. 그런 만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건이기도 한데... 이 중국 혁명의 사례가 직후에 일어난 쿠바 혁명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억지스럽다. * 가장 중요한 점으로, '농민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농민들을 지지자로 이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해방구를 확보한다'는 전략은 '''마오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써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 전략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오주의]] 항목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당장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2월 혁명은 분노한 대중들의 파업과 시위에 진압군 병사들이 합류함으로써 차르 정부가 전복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고, 10월 혁명은 볼셰비키의 적위대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 및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즉, 레닌의 혁명 전략에는 '''애초부터 게릴라전이 없고''', 사회적 기능이 집중된 도시를 기반으로 단숨에 정부를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주된 목표다. 이에 비해 마오주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농촌 지역에 넓은 해방구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도시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것을 주된 전략으로 삼는다. 실제로 [[적백내전]]에서 적군의 승리 자체도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혁명 초기 극동, 우크라이나, 카프카스에서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들고 일어난 지방 혁명 세력들은 거의 다 외부 간섭군의 지지를 입은 백군에게 제압당했다가 나중에, 주로 1920-21년쯤에야 러시아의 전통적인 국력의 핵심지방인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에서 원정온 붉은 군대의 정규군이 통상적인 점령전으로 진주해 다시 재점령하는 크게보면 정규 야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은 [[쿠바]] 상륙 작전에서 정부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전투 능력을 거의 완벽히 상실해 버렸다. 그나마 20명 채 안 되는 생존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도망가 거점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인력 및 장비 면에서 도저히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점을 마련한 공산주의 혁명군은 군사작전 대신 일단 주민들을 도와주며 인간적 유대관계를 쌓는 작업을 시작했다. 군사적으로 정부군에 감행할 작전을 수행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단은 불쌍한 산골의 주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며 다시 세를 불리기로 했던 것. 당연히 주민들은 이들이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혁명군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외지에서 온 착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방향으로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은 대민봉사활동 - 특히 [[체 게바라]]의 의료 지원 활동이 주민들에게 큰 호감을 산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낙후된 곳일수록 봉사활동 중 지역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료 봉사활동이다. 아예 병원이 없거나, 설령 있다 해도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이 심각한 상태가 되어 죽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낙후된 곳일 수록 위생상태 또한 매우 열악해지기 때문에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넘쳐난다. 또 체 게바라는 당시 혁명군중 유일한 의사였기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고, 혁명군 내에서의 위상과 지위도 자연스럽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의 거점 주변으로 광범위한 지역이 '''무력으로 점령하지도 않았는데 해방구가 되었다.''' 이 때부터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은 광범위한 해방구 지역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소수 인원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정부군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고, 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게릴라 병사를 늘릴 수도 없었던 것이, 당장 그들에게 제대로 지급할 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군이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들어온 순간,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지역 주민들에 의해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에게 전달되었고, 공산주의 혁명군은 그들을 가지고 놀았다. 특별히 정부군과 싸워 점령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해방구는 계속 확장되어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전선이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바티스타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정부군은 해방구 안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단지 잡아야하는 게릴라는 안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알과 폭탄이 날아올 뿐.]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사용한 결과는 쿠바 혁명의 성공.[* 그래서 게릴라전을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단순히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킨다기 보다, 끊임없이 주민들과 상호 공존하며 지지자를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